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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살며 사랑하며

by 세익 2022. 6. 30.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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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知者弗言, 言弗知 ]

통행본 장 56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며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

날카로움을 꺾고 분란을 푸니

이것을 현묘한 어울림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할 수도 없고 또 멀리할 수도 없다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된다.

知者弗言, 言者弗知. 塞其兌, 閉其門, 和其光, 同其塵, 挫其銳, 解其紛.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亦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亦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亦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1)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弗言, 言者弗知

일부 연구자는 여기에서 '지'를 지혜롭다〔智〕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고 주장한다(엄영봉). 초간문에서는 '지(智)'다. 하지만 그 다음에 대명사 '지(之)'가 있기 때문에 역시 동사로서 '안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왕필·하상공은 모두 이 문장을 도의 추상성과 연결시키지 않고 근신하고 조심하라는 『노자』의 처세훈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왕필은 아는 자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연에 따르기 때문이며, 말하는 자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사단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하상공은 "아는 자는 실천을 귀하게 여기지 말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도 입소문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말이 많으면 근심도 많다"고 주해하였다. 그렇지만 성현영 이후 거의 모든 주해는 "도는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범응원)"는 식으로 도와 관련지어 이 문장을 해설한다.

나중에 왕필·하상공의 해설을 압도하게 된 이런 해설의 기원은 『장자』에 있다. 가령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도는 책에 있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뜻〔意〕이다. 뜻은 따르는(가리키는) 바가 있으니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다(「천도」)"라는 말이나 도를 물은 지(知)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은 무위(無爲)가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이야기하는 「지북유」의 고사는 모두 진리가 언표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 두 곳에 모두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그렇지만 왕필·하상공처럼 이 문장을 해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성현영 이후의 일반적 해설을 따랐을 때는 그러면 노자는 『노자』를 왜 말했는가 하는 유서 깊은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는 『노자』의 이 문장을 두고 잘 알려진 시를 한 편 지었다. 제목은 「독노자(讀老子, 노자를 읽음)」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을 삼가니2)

이 말은 내가 노군(老君)에게서 들은 것이라

정말 노군이 아는 자라 한다면

어찌 자기는 오천언을 지었는고

이에 대한 범응원의 변명은 이렇다.

"이것은 노씨가 후세 사람들이 언사(言辭)에 함입되어버리고 스스로를 반성하여 이 마음의 처음 모습에서 진리를 구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을 통해서 뜻〔意〕을 구하도록 한 것이니 뜻을 얻었다면 말을 잊을 것이다." 이 변명은 흔한 것이지만 궁색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왕필·하상공의 해석이 강력한 느낌을 주는 것은 뒤의 문장을 읽었을 때다. 뒷문장들 전부는 그리고 그 핵심적 어휘인 "오묘한 어울림〔玄同〕"은 모두 재앙을 만나지 않고 안전하게 사는(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말이며, 왕필·하상공의 주해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으며,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 날카로움을 꺾고 분란을 푸니

塞其兌, 閉其門. 和其光, 同其塵. 挫其銳, 解其紛

이 문장은 통행본과 순서가 좀 다르지만 백서와 초간문이 일치하므로 백서의 순서가 원래의 모습일 것이다. 아울러 이 문장의 앞 두 구절은 다른 글(52)에 그대로 나오고, 뒤의 네 구절도 다른 글(4)에 순서가 바뀌어서 나온다. 그래서 이곳의 문장이 연문이라는 설이 많았으나 백서에서는 갑·을본 모두에 이 문장이 두 번씩 나온다. 연문으로 볼 수 없다.

앞의 두 구절은 이미 해설하였다(다음 참조). 요약하면 이 두 구절은 남(신하)에게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속뜻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빛을 누그러뜨린다" 이하의 네 구절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상공은 "정욕은 모나게 행위해야 하는〔銳爲〕 바가 있으므로 마땅히 도를 생각하고 무위하여 그것을 꺾어야 하고, 분란이란 한을 맺은 것이 끝없는 것이므로 마땅히 도를 생각하고 무위하여 그것을 풀어야 하며, 비록 혼자만 아는 밝은 지혜가 있더라도 마땅히 그것을 누그러뜨려 어둡게 함으로써 빛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혼자만 별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설하였다.

곧 이 문장은 가능한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렇게 보아야만 전체 문장이 앞뒤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통행본 4장 역시 도체(道體)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넘침과 모자람의 중간에서 항상 조화를 견지하는 도의 덕성에 대한 설명이고, 또 그 도를 본받는 성인에 대한 묘사다.

이것을 현묘한 어울림이라고 한다

是謂玄同

하상공은 『노자』의 '현(玄)'을 한 곳(51)만 제외하고 모두 '하늘'로 이해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현동(玄同)'이란 하늘의 도와 함께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글(56)에 대한 하상공의 기본 시각을 감안하면 하늘의 도와 함께한다고 해서 무슨 현학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현'을 일관되게 '현묘하다'로 옮겼다.

전체적으로 이 글을 도에 대한 서술로 보는 사람은 대개 '현동'을 도와 같이한다거나 현리(玄理)와 같이한다는 식으로 본다. 하지만 나는 오징의 해설을 참고하여 '현묘한(절묘한) 어울림'이라고 옮기도록 하겠다. 오징은 이 글이 처세하고 응물(應物)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나나 다른 사람의 예리함과 둔탁함, 빛남과 어두움을 모두 분별하지 않고 세상과 함께 하나가 되니〔齊同〕 그 오묘함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현동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회남자』 「설산훈」은 오징의 해설을 뒷받침한다.

아름다움을 구하면 아름다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아름다움을 구하지 않으면 아름다워지며, 추함을 구하면 추함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추함을 구하지 않으면 추해지니 아름다움을 구하지도 않고 추함을 구하지도 않아서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는 것, 이것을 현동이라고 한다.

곧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일이므로 너무 잘 되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부러 나쁘게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적당하게 섞이는 것이 현동이라는 말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런 조화로움은 진인(眞人)의 표징이다. "대단히 친한 것도 없고 대단히 소원한 것도 없으니 덕을 끌어안고 부드러움을 길러 천하에 순응하는 것, 이것을 진인이라고 한다(「서무귀」)."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할 수도 없고 또 멀리할 수도 없다.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故不可得而親, 亦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亦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亦不可得而賤

현묘한 어울림(현동)의 결과가 이러하다. 인간의 상정은 가까이할 수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없고, 귀하게 할 수도 없는 것보다는 멀리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할 수 있다면 멀리할 수도 있고, 이롭게 할 수 있다면 해롭게 할 수도 있으며, 귀하게 할 수 있다면 천하게 할 수도 있기(왕필)" 때문에 『노자』는 "영예를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홀로 떨어진 것을 슬픔으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도록 하고, "몸으로는 부귀를 원하지 않고 입으로는 오미(五味)를 원하지 않음으로써" 누구도 이롭게 할 수 없도록 하며, "어지러운 세상의 주인이 되지도 않고 암혼한 군주의 지위에 처하지도 않음으로써(이상 하상공)" 누구도 귀하게 할 수 없게 하여 절실히 원하는 안전한 삶을 얻고자 한다. 누구도 멀리하지 못하고, 누구도 해롭게 하지 못하고, 누구도 천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그를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잘 아는 것이 『노자』다.

이런 사람, 이런 걸 좋아하는가 하면 저런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성격이 이런가 하면 저런 것 같기도 하고, 귀한가 하면 천한 것도 같기도 한 이런 사람이 바로 잘 알려진 우화에서 공자가 묘사하고 있는 노자의 사람됨이다.

나는 새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고기가 헤엄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짐승이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용은 어찌 알겠는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그 모습을. 내가 오늘 노자를 뵈니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사기』 「노자한비열전」)

그러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된다

故爲天下貴

바로 앞의 구절에서 "귀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서 다시 여기에서 "천하의 귀한 것이 된다"고 하였으므로 고형은 여기에서의 '귀(貴)'는 '정(貞)'의 잘못된 글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의 귀함은 귀천의 상대적인 귀함이 아니라 '천하의 귀함'이다.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 주어지는 귀함이 아니라 장구함과 안전을 보장받은 귀한 삶이다. 그러한 귀함이야말로 『노자』가 전편을 통해 강조하고 또 얻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도는 책에 있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뜻〔意〕이다

뜻은 따르는 바가 있으니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다

―『장자』 「천도」

[네이버 지식백과]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弗言, 言者弗知]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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